항해용 시계 만들기
해도에도 없는 망망 대해를 수천 킬로미터씩
항해하면서 세계를 탐험하던 시대가 수 세기에 걸쳐 있었다. 이 때 배를 탄 사람들에게는
배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항법장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배가
떠 있는 위치와 안전한 항구로 가는 뱃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폭풍우를
만나 항로를 이탈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항해자들은
북극성이 수평선에 대해 이루는 각도를 잼으로써 북반구에서 위도를 알아낼 수 있었는데,
이것은 꽤 오래 전부터 가능하였다. 그러나 동서 방향으로의 항해는 거의 전적으로
목숨을 건 추측에 의존하였다. 만약 그 당시에 영국 그리니치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있었더라면 그리니치를 중심으로 동쪽이나 서쪽으로의 위치도 쉽게 알아내었을
것이다.
배에 실을 정확하고 믿을 만한 시계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 때문에 발명가들은 더 좋은 시계를 만들어 내도록 강요받았다. 많은 시계들이
조금씩 개선되면서 등장하였으나 돌파구 역할을 한 것은 추시계였다. 그러나 추시계는
바다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배가 전후 좌우로 흔들리는 바람에 추가 제대로
동작하지 못하였다.
1713년에 영국 정부는 경도를 1/2 도
이내에서 알아낼 수 있는 크로노미터 (경도 측정용 시계)를 만드는 사람에게 20,000
파운드의 상금을 내걸었다. 이 상금을 쫓던 많은 기술자들 중에서 영국인 존 해리슨이라는
시계 제작자가 상금을 타게 되었다. 그는 그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는 시계를 만드는데
40여 년의 세월을 바쳤다. 흔들리는 배에서도 동작되고, 금속 스프링의
심한 수축과 팽창의 원인이 되는 온도차이도 극복하고,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에도 견뎌내는 시계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나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거의 완벽한 크로노미터를 제안했을 때, 영국 정부의 위원회에 소속된 위원들은 그
시계를 시험하기 위해서 바다에 나갔다가 시계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해리슨이 똑 같은 시계를 하나 더 만들 때까지 시험 여행을 연기하였다. 마침내
1761년에 해리슨의 아들인 윌리암은 그 장치를 시험하기 위하여 자마이카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수일간 계속된 폭풍우 속에서 배가 항로를 크게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크로노미터는 놀랄 만큼 정확하게 동작하였으며 수개월 동안 경도로 1/60 도 이내에서
유지되었다. 그 덕분에 윌리암은 바다에서 1/3 도 이내에서 경도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해리슨은 20,000 파운드의 상금을 청구했는데, 그 중 일부의 돈은 그가 이미 받았었고
나머지 돈은 그 이후 2년간에 걸쳐서 지급되었다. 이 때가 그가 죽기 3년 전이었다.
해리슨의 크로노미터가 만들어진 후 반세기 동안 비슷한 모양의
장치들이 손재주 있는 시계공들에 의해 수공으로 제작되었다. 이것은 아주 비쌀 뿐만
아니라 중요한 장치로서 항해를 하는 배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장치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졌으며 그것을 돌보는 의무를 맡은 사람은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다.
오늘날 대양을 항해하는 선박의 승무원들은
해리슨이 상 받았던 그 크로노미터만큼 정확하고 믿을 만한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
그러나 배에 장착되어 있는 크로노미터는 해리슨의 장치와 근본적으로는 같은 기본원리에
바탕을 두고서 만들어진 것으로 현대적인 항법장치의 정교한 보조장치로서 오늘날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정리: 이호성, 1999.11.1.)